일본 이야기
제 2부...역사를 알면 일본이 보인다.
열도...
일본은 동북아시아 해상에 자리잡고 있는 좁고 긴 열도로 되어있다.
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동양문화의 중심지인 중국에서 선진문물을 받아 들이면서 그들의 문화를 발전 시킨다.
중국이나 대륙의 문명지대로 부터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으므로 그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야요이 문화.. 한국의 영향을 받은 벼농사중심의 농경문화로 BC 3세기경에서 AD 3세기사이에 꽃을 피운 문화.
아스까 문화..백제의 영향을 받은 7세기 전반의 불교문화.
나라 문화..8세기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문화.
등을 차례로 발전시켜 나간다.
일본은 이미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한반도를 거쳐서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당나라시대에는 630년에서 894년까지 약 15년 간격으로 19회에 걸쳐 적게는 150명에서 많게는 500여명에 이르는
유학생중심의 "견당사 (遣唐使)" 를 파견 하였다.
이과정에서 일본은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어들이는 외국문물의 수입패턴이 정착 되었다.
사루마네...
사루..우리말로는 원숭이 이고
마네..흉내를 낸다는 뜻이다.
원숭이처럼 흉내를 잘 낸다는 말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원래 '사루마네' 라는 말은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토요또미 히데요시가 원숭이처럼 생겨서 오다 노부나가가
그를 부룰때 '사루' 라고 불렀는데 그가 워낙 모방을 잘했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고 한다.
일본에서의 '사루마네' 는 남의것을 슬적하거나 멸시받는 사람이 아니라
능력있고 남의것을 모방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역성과 타협. 공존...
일본은 거의 서구와 같은 지방분권적 봉건적사회가 존재 했던것만은 분명하다.
가마꾸라 막부시대나 무로마찌 막부 새대는 물론이고 에도 시대에도 전국이 약300명의 영주에 의해서
분할통치되던 지방분권 새대였음을 알수 있다.
"고대 씨성제사회와 직업의식"
중도 세습하는 나라
"중세 무가사회의 전통"
사무라이란 무엇인가.
'사무라이'라고 불리는 武士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것과는 그의미가 좀 다르다.
카마꾸라 막부에 이은 무로마찌 막부시대에는 지방분권화가 더욱 촉진되어 무로마찌 막부는 각지의 유력한 영주들에 의한 연합정권의 성격을 띠었다. '다이묘오' 라고 불리던 영주들은 각자 독자적인 가신단을 조직하고 분국법을 제정하여 독자적인 지배권을 확립.
한 지역의 왕과 같은 존재인 다이묘오들의 독자성이 갈화됨에 따라 그들에 대한 막부의 통제권이 약화되고 마침내는
100명의 다이묘오들이 100여년간 할거하면서 서로 싸우는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온다.
전국시대 말기가 되면 전국을 재패하기위한 다이묘오들의 대립이 극에 달한다.
먼저 '오다 노부나가'가 機內지역을 대충 통일해놓고 죽자 그 뒤를 이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통일을 달성 하였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중에 병사하자 '토꾸가와 이에야스'는 그 뒤를 이어 천하를 통일한 다음 지금의 도오교오에 에도 막부를 세웠다. 에도 막부는 전국을 약300명의 다이묘오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지방분권적인 봉건사회를 제도화 시켰다.
다이묘오들은 큰 성을 중심으로 '죠오까마찌'를 조성한 다음 거기에 사무라이나 상인과 공인들만 거주하게 하고 농민은 농촌에서만 살게 함으로써 철저한 직업분화와 병농분리를 실시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칼을 차고 시내를 활보하는 사무라이는 여기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사무라이는 단순한 칼잡이가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공무를 담당하는 우리나라의 양반과 같은 존재였다.
동생을 이혼시켜 시집보낸 히데요시
일본말에" 이끼노꼬루(生殘)"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살아 남는다' 는 뜻으로 100여명의 영주들이 100여년간 서로 살아남기 위하여
발버둥치던 전국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100여개의 지방으로 나뉘어서 100여년간 싸우던 당시는
살아 남는것만이 최대의 가치였다. 절대 강자가 없는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 타협하면서 공존하는 길밖에 없었다.
100년간 계속된 전국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킨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토꾸가와 이에야스 이 세 사람이 일본 역사상
최대의 인물로 시대에 따라 일본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면서 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세사람은 일본의 각 특성을 대표하는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다.
오다 노부나가는 성격이 불같이 급하고 결단력이 있는 반면에,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단히 꾀가 많은 인물이고 토꾸가와 이에야스는
여섯살부터 13년간 인질생활을 한 탓에 대단히 신중하고 인내심이 강한 인물이다. 세사람을 상징하는 표현이 있다.
당시에 좀처럼 울지 않는 새가 있었는데 세 사람에게 이 새를 울리게 하면 오다 노부나가는 새에게 울라고 명령을 한다음 그래도 울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칼로 목을 베어 버리고,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무슨수를 써서라도 울리고, 토구카와 이에야스는 언젠가는 울겠지 하고
새장밑에 드러누워 기다린다는 것이다..라고. 우리말로 표현하면 오다는 용장, 토요토미는 지장, 토구가와는 덕장 이라고.
최종적으로 일본을 통일하여 에도 막부260년의 기업을 닦은 사람은 때를 기다리는 토꾸가와 이에야스였지만 난마와 같은 뒤엉킨
전국시대를 대충 통일하여 가닥을 잡아놓은 인물은 역시 불 같은 성격에 결단력 있던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는 그 불같은 성격 때문에 결국 부하인 아께찌 마쯔히데 에게 살해되고 같은 부하였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아께찌 마쯔히데를 제압하고 오다 노부나가의 기반을 이어받게 되었다.기반을 이어받은 히데요시는 거의 천하를 통일하고 오직
동쪽의 강자인 이에야스만을 남겨놓게 된다.
토꾸가와 이에야스는 인내의 천재였다. 그는 이마가와 요시모도의 인질로 있을때 그의 조카사위가 되었는데 그가 그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죽은 뒤에는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관계를 맺고 그것을 공고히 하기위해 이번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했다.
토꾸가와 이에야스의 부인 입장에서 보면 원수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드린 셈이다. 이런 관계로 이에야스의 부인과 그녀의 영향을 받은 아들 토꾸가와 노부야스는 며느리와 그친정아버지인 오다 노부나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런저런 것이 이유가 되어 오다 노부나가는 토꾸가와 이에야스에게 자기의 사위인 토꾸가와 노부야스와 그생모를 할복시킬것을 명령했다.
토꾸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요구를 받아들일것인가 저항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아들과 부인을 할복시키고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이것이 "이끼노꼬루"인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뒤에 그 기반을 이어받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거의 천하를 통일해놓고 최종적으로 동쪽의 강자인 토꾸가와 이에야스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꾀보였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만약 토꾸가와 이에야스와 싸워서 이기면 다행이지만 승리하지 못하면 천하의 패자로써의 위신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는만큼 어떻게든 싸우지않고 꾀로써 토꾸가와 이에야스를 굴복시킬 궁이를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것이 여동생인 아사이히메를 토꾸가와 이에야스에게 출가시키면 토꾸가와 이에야스가 자기의 손아래 매제가 되므로
자기와의 사이에는 자연히 상하관계로 확정되고 천하의 패업이 완성된다는 묘수였다. 그런데 마침 토꾸가와 이에야스는 상처를 하여 그의
정실자리가 비어 있었다. 불행하게도 아사히히메는 40이 넘었고 거기에다가 결혼해서 금실 좋게 잘살고 있었다.
할수없이 여동생을 이혼시킨 다음 토꾸가와 이에야스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결심을 하고 아사히히메를 불러 설득을 했다.그말을 들은 동생과 어머니가 난리를 쳤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동생에게 '네가 만약 토꾸가와 이에야스에게 시집을 가지 않으면 나와 토꾸가와 이에야스가
결전을 하지 않을수가 없다. 이기더라도 수만명의 사람이 죽게 된다. 만약에 지게된다면 어머니와 우리 가족은 물론 너와 네남편까지도
전부 죽는다. 너 한 사람만이 희생되면 우리 가족과 네남편은 물론 수만명의 생명을 구할수 있는데 그들을 위해서 희생할수 없다는 말이냐,
사실은 희생도 아니다. 지금의 네 남편은 이름도 없는 존재지만 토꾸가와 이에야스는 일국의 왕이다' 라고 설득했다. 결국 그녀는 설득됨.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겨우 아사히히메의 승낙을 받아 토꾸가와 이에야스에게 혼인을 제안하자 그냥 복종 하자니 면목을 잃어 다음을 기약할수없고 그렇다고 대항해서 싸우자니 이길 자신이 없어서 무엇인가 타협책을 생각하고 있던 이에야스도 선듯 아사히히메를 정실로 맞아 들였다.이렇게 하여 두 사람간에는 자연스럽게 상 하 관계가 이루어짐으로써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통일을 달성할수 있게 되었고
토꾸가와 이에야스는 체면을 손상시키지않고 위기를 모면함으로써 후일을 기약할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적과도 타협하고 웃으면서 곤존하던 시대가 전국시대 였다. 당시에는 살아남는 것만이 가치의 전부였다.
굴욕을 참고 기회를 기다리던 토꾸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중에 병사하자 드디어 칼을 빼어 1600년 '세끼가하라' 싸움에서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격파하고 대망의 천하를 차지 했다. 그후 토꾸가와 이에야스는 토꾸가와 일족의 가신 그리고 세끼가하라 싸움
이후에 복속한 다이묘오들에게 전국을 나누어 주었다. 가마꾸라 막부 이래 다이묘오는 독자적으로 일족과 가신을 거느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도 부하를 형성하고 일정한 지역과 농민을 지배하는 피라미틍 형태의 지배구조를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오다 노부나가나
터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토꾸가와 이에야스가 비록 천하를 통일했다고는하나 그렇게 간히 다이묘오를 교체할수 있는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나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마찬가지였지만 토꾸가와 이에야스도 천하를 통일 한뒤에 자기 일족이나
가신뿐만 아니라 세끼가하라 싸움이후에 복속한 다이묘오들에게도 땅을 나누어주고 자기 일족이나 가신출신 다이묘오들로 하여금
철저히 감시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적과도 타협하고 공존하는것이 당시의 일본 사회였다.
적까지도 끌어들여 타협하고 공존하는 자세는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 이부분을 몇번이고 읽으면서 이 세사람의 관계를 이해 할수가 있었다.
또한 케이블 티비에서 방영하는 NHK 방송국 역사드라마
"풍림화산"을 보면서 세끼가하라 싸움을...
"공명의 갈림길"을 보면서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토꾸가와 이에야스를 좀더 잘 알수가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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